일엽,나혜석,이응노 그리고 만공스님
사랑은 언제나 슬픔으로 막을 내리고
연등들의 호사스런 마중속에 찾은 수덕사
4월 중순의 수덕사는 한창 봄단장으로 부산하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는 연등도 연두빛 새순과 어울려 경내를 찾는 이들에게 살가운 인사를 한다.
수덕사는 여느 타 사찰과 달리 애련하고 가슴 한켠에 슬픔마저 서려 종종 찾는 사찰이다.
최근 84세로 이승을 하직한 서천 랑승만시인의 장례식장을 다녀와서인지 이곳을 거쳐간 예술인들의 아픈 사연과 겹쳐 봄의 환락을 마냥 즐길 수가 없다.
젊은날 주부생활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졸지 중풍에 걸린 후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40여년간 오로지 시 원고료만으로 생활을 해야 했던 선생이다.
중풍에 쓰러진 후 아내도 떠나고 두 아이를 가난이란 울타리속에서 길러온 시인은 서정적이면서도 눈물의 시를 후배 문인들에게 던져 주었다.
나도 랑선생의 뒤를 돌봐주고 시 수업도 받는다며 한 6개월 함께 기거하며 생활의 무게를 덜어준 적이 있다.
명석하고 두뇌가 뛰어났던 장남도 정신질환을 앓고 둘째는 밤무대를 전전한다.
장례식장에는 찾아온 문상객들에게 건네줄 어떤 음식도 없다.
긴급히 문인의 주머니에서 털어낸 믹서 커피가 전부이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보령댐 도수로 공사 현장을 보기 위해 예당저수지를 향하다가 잠시 둘러 본 이후 다시 찾은 충남 예산군의 수덕사 입구 일주문 옆 수덕여관은 사찰경내와는 달리 또 다른 아련함이 정적속에 깔려 있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5대 총림중 하나로 덕숭총림으로 많은 스님들이 강학과 참선정진하는 종합교육도량으로 충청남도 내포 일대의 36개 말사를 관장하는 제7교구본사이고 역사적으로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고찰이다.
백제사찰 가운데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정사 등 12개의 사찰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사찰이다.
유명한 고승도 고승이지만 아픈 기억이 있는 미술과 문인들의 발길이 숨쉬다 간 곳이라 나에게는 친밀도가 더 높다.
고승중에는 구한말 1880년대 끊어진 선불교의 수행체계와 법통을 다시 수립하고 잇게 한 경허스님은 수덕사 인근의 천장암, 부석사, 개심사 등지에서 주로 보림하며 수월, 혜월, 만공, 한암스님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제자중 수월스님은 만주로 건너가서 숨은 도인으로 살다 열반에 들고 혜월스님은 부산으로 내려가 운봉성수, 향곡혜림, 진제법원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루게 하여 격 높은 스님들을 많이 배출시켜 우리나라 불교계의 학술적 바탕을 튼실하게 한 도량이다.
한암 스님은 월정사로 건너가 탄허택성, 보경희태, 만화희찬 스님으로 이어지는 오대산 법맥을 만들었으며, 수덕사에 남은 만공스님은 보월성인, 용음법천, 벽초경선, 혜암현문, 고봉경욱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 스승이 뿌린 선불교의 씨앗을 곳곳으로 퍼져 나가 뿌리내리게 했다.
이런 큰 스님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을까, 예술계에서도 근대시대의 대표적인 화단과 문인, 여성운동의 텃밭을 조성해 주고 있다.
일주문 앞에서 경내로 가는 길목에 화단을 조성하고 있는데 피어난 꽃들이 펜지꽃과 튜율립등 서구꽃들로 치장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실망감이 앞선다.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이 님프에게 맞지 않고 제비꽃에 맞아 원래 하얀 꽃이던 제비꽃이 보라, 노랑, 하양 등 삼색으로 변하는 펜지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수덕사와는 왠지 거리가 멀다.
충청도 지역 일대에서 자생하다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에 있는 산작약이나 선제비꽃,솔붓꽃등을 심었으면 꺼져가는 야생생물도 살리고 수덕사다운 생태환경의 복원지로도 재탄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기만 하다.
염상섭,김동인등 당대 문학인과 함께 동인활동을 한 김일엽(김원주-본명)스님, 화가며 문인이며 여성운동가인 나혜석,동백리 사건으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세계적인 한국화가 이응노화백등이 수덕사와 인연이 깊다.
일엽스님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빠른 1907년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 우리나라 신시의 지평을 연 한국 최초의 여류시인이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행위 예술가로 전위예술가로 젊음을 살면서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반기를 들었던 당대 최대의 여성사회운동가.
진남포 삼숭여학교,이화학당,일본 닛산학교로 유학한 일엽스님은 18살이나 많은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인 이노익과 22살 때 결혼했으나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과의 심적 고통속에 4년간의 신혼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유학시절 사귄 시인 노월 임장화와의 간통 사건으로 이혼하게 된다.
이후 일본인 오따 세이죠와 열애중 아들 김태신을 낳았으나 오따상에게 넘겨주고 귀국한 후에는 유덕의 애인인 방인근과 삼각관계로 파장을 일으키다가 동아일보 정치부 국기열 기자와 잠시 동거에 들어간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백성욱박사와 사랑의 깊이를 더해갔지만 백성욱이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자 재가승 하윤실과 다시 동거하게 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 일엽스님은 만공스님의 인도아래 불같은 열정과 사랑의 몸부림 끝에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스님이 되어 수덕사 주변에 위치한 견성암에서 불도를 닦게 된다.
후에 장성한 아들 김태신이 찾아왔지만 –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고 말했던 김일엽의 인생이 영산홍보다 붉게 타오른다.
일엽의 저서인-어느 수도인의 회상-,-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와 같은 에세이집은 만공스님의 제지에 20여 년간 절필하다가 쓴 60년대 초반의 글들로 나에게도 많은 감동과 아픔을 던져준 글들이다.
수덕산장 옆에 마련된 미술전시관에는 어느 여류화가의 강렬하면서도 외로움이 잔뜩 묻어나는 색조의 동양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였으나 죽음이 드리울 때까지 만날 수 없었던 여인 나혜석을 떠 올린다..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화풍으로 당대 조선화랑을 점령했고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성적인 금기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자전적 소설-경희-,자신의 외도를 스스럼 없이 고백한 소설 –노라를 놓아주게-의 저자인 나혜석.
여자도 사람이다, 명절 증후군을 국내 최초로 사회적 화두로 던진 여성 나혜석은 -성이 지저분하거나 추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는 이혼고백서-를 파인 김동환이 창간한 문학지 삼천리에 공개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혜석의 아명은 나명순, 아호는 정월로 수원 삼일여학교에 다니다가 진명여고로 편입한후 일본 토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를 전공하고 정신여고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3,1운동에 참여 5개월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학시절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의대학생 최승구와 열애를 했으나 폐결핵으로 사망한 이후 춘원 이광수와도 잠시 열애하기도 했다.1920년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 프랑스로 남편과 함께 유럽여행길에 오른다.
나혜석의 삶 중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절인 유럽에서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설이 퍼지지만 최린과도 버림을 받고 이로 인해 김우영과 11년간의 결혼생활을 마감한다.
당시 당당하게 이혼고백장을 잡지에 발표하고 재산분할도 공개 요구하기도 하여 사회를 들끓게 했다.
뜨거운 연애를 했던 최린에게도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최린의 손을 들어 주었고 패배한 나혜석은 여성편력을 즐기면서도 정절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행태에 대해 그림과 글로 논박을 계속하며 당대의 사회와 온몸으로 싸운다,
정신적,경제적으로 지친 나혜석은 수덕사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 일엽스님을 찾았고 조실스님인 만공스님을 만나게 해달라며 자신도 입적하고자 했으나 끝내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며 거절당한다.
말년인 40년대 초에는 파킨슨병과 우울증으로 양로원과 오빠집을 전전하다가 해방이후인 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사망한다. 나혜석의 나이 52세였다.
그리 보면 얼마 전 두자식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다 죽은 랑시인은 행복지수가 나혜석보다 높은 것일까,낮은 것일까, 우문을 던져본다.
이응노와의 인연은 잠시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찾아온 젊은 화가들과의 교감속에서 스승과 제자사이의 인연이고 이 인연으로 나혜석이 떠난 수덕여관을 후에 이응노화백이 인수하여 경영하게 된다.
살벌한 유신시대 문학청년으로 20대를 술집과 시 –오적-,-껍데기는 가라-등 금기문학서적을 읽고 –개가 짖을 때-라는 시낭송으로 당시 안기부 조사를 받기도 하면서 예술인들과의 교감속에 살던 시절 미술을 하는 친구에게 버림받은 그 어여쁜 스므살 여인도 홀연 비구니가 되어 어느 암자속에서 수행한다고 하던데.
예쁘고 당찬 여인들의 사랑은 언제나 슬픔으로 마감하고 결국은 절을 찾아갈까.왜.
하긴 수녀가 된 예쁜 시를 썼던 여자시인 지망생도 일주문을 벗어나니 돌연 환영처럼 투영된다.
이제 내 인생에서도 그 불같은 사랑과 슬픔이 가슴을 갈갈이 헤지게 해도 다시는 온몸으로 맛볼 수는 없겠지.
사랑의 불같은 열정은 젊은날의 추억속으로 젖어들고 봄향기에 흠뻑 달아오른 젊은 여인들의 예쁜 모습들을 훔쳐 보면서 과년한 딸의 일상을 떠 올리니 이제 나이는 속일 수 없나보다.
연등으로 화려한 단장을 끝낸 수덕사를 내려와 맛 집으로 유명한 1년에 한번 정도 찾는 단골집 산촌에서 산채더덕정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를 마신다.
미래산업이기도 한 활성탄 공장에 대한 심의를 하기 위해 떠났지만 연두빛과 연등으로 휘감은 산사의 한나절을 온통 여인들의 추억으로 물들이게 한 봄나들이였다.
(2016년 4월, 길샘 김동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