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왕일 뿐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던 조선시대의 왕이 있었다.
고명대신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에 의해 통치가 좌지우지되었다.
이를 가리켜 황표정사라 하는데 황표정사란 인사 행정 시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올릴 때 의정부 대신들이 미리 의논하여 정한 인물의 이름 위에 황색 표지를 붙여 놓는다.
왕은 황색표지가 붙은 인사를 그대로 등용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결국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2년 만에 이름뿐인 왕의 자리를 스스로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의 통치시대를 비유하는 대표적 표현이 황표정사이다.
상왕인 단종은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행이 된다.
재위기간은 3년 1개월의 짧은 치정과 17세의 어린나이로 영월에서 활시위로 목숨을 잃게 되는 슬픈 임금 단종.
오늘날 대통령을 중심으로 총리, 장관 등 국무대신들이나 하부로 내려가 국장, 과장, 사무관, 주사 등의 직급이 나눠있다. 이들은 주어진 업무의 틀에서 소신과 철학 아울러 국가관과 국민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고 국민은 믿는다. 하지만 황표정사(黃票政事)처럼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다양한 곳에서 비춰진다.
한 부처의 사무관만 해도 분야에 따라서는 관련 분야의 중소기업을 10개 혹은 수백여 개 이상을 이끌어 가는 작은 CEO며 왕회장이다.
그들의 통치행위(법, 제도개선)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흥하고 망하기 일쑤이다.
타 부처는 차치하고 환경부의 과거 정책방향에 따라 제 2, 제 3의 사업 확산을 하는 성공한 기업보다는 대부분 1막도 제대로 마감하지 못하고 사회 저편으로 (영월로 유배 가듯) 밀려나는 사례가 빈번하다.
그래서 성공한 기업들의 CEO들은 ‘정부가 하라는 지시에 반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라고 쓴 소리를 내뱉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한국 내에서의 슬픔은 애국심에 너무 과열하게 불타 공격적인 마케팅을 한 기업인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범양식품의 도산이다.
범양식품은 코카콜라의 한국 지역판매를 하면서 사세를 확장하다가 코카콜라의 국내 영업을 직접 뛰어들겠다는 방향 점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콜라독립 815’를 출시하면서이다.
더구나 범양의 계열사인 샘물회사인 건영식품이 부도가 나면서 국산콜라 브랜드인 ‘콜라독립 815’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 버렸다.
815를 출시하면서 외국계 음료업체와 국내 대기업 식품회사들의 물량공세와 판촉행사는 결국 815콜라의 독립선언을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게 한다.
이 같은 사례는 환경산업체에서도 만날 수 있다.
PH분석기기 등 대중적인 분석 장비는 미국의 하크(Hach)사 제품이 국내 시장을 석권하던 시절이다.
분석 장비 자체가 국내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미국 하크사 제품을 독점 공급하던 유일정공은 당시로서는 사세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면서 튼실한 분석기기 유통회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은 해외제품을 통해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면서 국산분석기기를 개발하게 된다.
그 첫 작품이 정부가 의무적으로 유역별로 설치하고자 했던 BOD분석 장치였다.
유일은 제품개발에 성공했고 국내 시장에 보급하고자 했으나 정부, 지자체, 산하기관들은 냉소적으로 대했고 정부는 품질자체를 외면했다.
국산 분석 장비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무조건적인 불신은 결국 국가적으로 애국적인 공헌사업을 해보고자 했던 중소기업을 영원히 이 땅에서 몰아냈다.
국내에서 최초로 광촉매를 활용한 탁도계를 개발한 기업도, 독일의 쥐벼룩보다 더 민감하고 분석 정확도가 높은 반달말을 이용한 오염지표 분석 장비를 개발한 기업도 문을 닫았다.
이들 기업들은 모두가 애국적 제품을 만들려 했던 독립 형 기업인들이었다.
지금도 분석기기 시장에서 한국의 제품들은 저급 취급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이윤은 외국산 제품을 단순하게 도입하여 판매하는 분석회사들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
기상청 장비에서부터 여러 분야에서 애국제품들은 대부분 도산하거나 업종을 변경하여 목숨을 유지하는 기업들이 대다수이다.
국산제품으로 전환되어 국내시장을 주도하는 제품군들인 밸브, 수도미터기, 유량계, 교반기, 감속기등도 더 이상의 선진 형으로 지속적인 개발을 하지 못하고 하향평준화 기술로 머물고 있다.
이유는 정부가 기술을 선도하는 기회를 차단하고 가격경쟁을 통한 저질품만을 공급해도 된다는 제도적 장치에 의해 더 이상 미래를 향한, 세계시장을 향한 도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환경산업의 밑바닥.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기업을 웃고 울리게 할 수 있는 사무관을 황표정사인 꼭두각시로 몰고 있는 것은 국장인가, 차관, 장관인가. 혹은 그 위의 정치계인가, 국가 통치자인가.
자신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내지 못하고 황표정사의 치정을 했던 단종.
초동의 피리소리에 적적함을 달래다가 활시위로 목이 조여 죽임을 당한 후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단종.
지금 영월에는 시신이 없는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고 김삿갓의 묘도 있다.
황표정사의 통치를 했던 단종이나 양반이 될 수 없는 김삿갓의 운명이나 다를 바가 없다.
동강은 아름답지만 그래서 슬픔이 어리는 곳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