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호 전환경부차관의 자전적 –공직심서-연재 17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정책
기후변화 협상력이 신시장의 거점 확보
대우그룹을 창립한 김우중 씨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저서를 써서 세간에 긍정적인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김우중 씨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더라도 세계 경영에 남다른 역량을 보여준 김우중 씨의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배울 점이 많다.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고 그것을 새로운 경제로 편입시키는 역량을 말하는 것이다.
정책 중에는 시장의 기능을 확장하고 활성화시키는 정책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장의 기능에 역행해서 시장을 고사시키는 정책도 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정부 정책의 주된 기능은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거나 보완하는 역할을 하여야 하며, 시장의 기능이 작동하는 것을 저해하거나 시장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정책이 자본주의적 자유경제질서를 유지하고 신장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것이 바로 헌법이 정한 기본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논리와는 별개로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국민의 경제생활이 윤택해지기 위해서는 잠재성장률을 상회하는 속도로 시장이 확대되고 새로운 시장이 창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의 시장이 가격을 중심으로 한 경제논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뒤에서의 시장은 생산과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는 장터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과정을 통해 부가가치가 창출되고, 그 속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져 임금이 발생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국민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준다는 측면에서 시장의 성장과 창출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 복리증진을 기본목적으로 하는 정책이라면 당연히 시장의 확대 및 성장과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수립 추진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정책은 우선순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장의 창출은 통상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나 정보의 획득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각국 정부는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목표로 기술개발 R&D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정보와 문화 같은 소프트웨어를 산업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개별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합종연횡으로 묶어지고 국제무대에서 협약이라는 형식을 통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와 관련된 협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국의 상반된 입장은 누가 새롭게 열리는 기후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UN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는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기후변화협약을 체결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행체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EU와 같이 기후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장을 예견하고 사전에 R&D에 막대한 투자를 해서 기술적 우위를 점한 국가들은 선진국과 개도국을 불문하고 모든 국가들이 온실가스 감축의무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상당수의 선진국과 개도국들은 만약 EU의 주장대로 될 경우 EU국가 등에 시장만 만들어줄 뿐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실익이 없기 때문에 강력한 온실가스 감축체제에 반대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협상을 이끌어가려 한다.
즉,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기후시장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장으로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가 각국의 기후변화협상에 임하는 전략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동안 우리는 후자에 속해 미국을 등에 업고 온실가스 감축체제에서 한 발 빠져 지내왔지만, 그렇다고 새로이 열리는 기후시장에서 우리의 몫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정책결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 정책을 국정과제로 추진하면서 기후변화 관련 기술개발에 투자를 시작했다는 점과 국내적으로 새로운 기후시장, 녹색산업 시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는 동향이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몇 년 전 EU국가들이 ‘REACH(Registration, Evaluation, Authorization and Restriction of Chemical substances)’ 라는 강력한 화학물질관리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EU 역내로 들어오는 모든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에 대한 40여 개의 위해성 정보를 등록하여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제품에 대해서는 수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 법 제정의 표면적인 이유는 유해한 화학물질로부터 국민들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 획득을 통해 미국과 일본에 빼앗긴 화학산업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회복하겠다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화학산업 시장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REACH제도의 시행으로 수십만 종의 화학물질에 대해 40여 개의 인체위해성 및 생태위해성 정보를 분석하기 위한 고급 시험·분석 인력의 고용창출은 물론 시험장비 및 약품과 같은 소재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의 효과를 알면서도 다른 나라들은 가만히 있겠는가? 미국이나 일본, 중국과 대만 등 많은 나라들이 EU의 REACH와 같은 법제를 만들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가 수출하는 제품의 화학물질 정보는 고스란히 외국에 제공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는 전혀 파악조차 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요, 국내 제품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 이미 이러한 생각은 REACH제도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설명회 당시 기업들로부터 나온 말이다. 비록 국내 산업의 경쟁력 확보 차원이 아니더라도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에 관한 정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다. 어느 제품에 어떤 화학물질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화학물질에 노출되었을 때 인체나 생태계는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화학물질 사고 시 신속한 대응조치를 취할 수 없어 피해가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관련부처는 당연히 REACH와 유사한 강화된 화학물질 등록·평가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닉하게도 기업에서조차 그 필요성을 강조한 법제를 산업육성을 주된 기능으로 하고 있는 부처에서 반대하여 한동안 애를 먹였고, 국회로 가서도 질질 시간을 끌다가 최근의 불산 누출사고 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나서야 허둥지둥 처리되었다.
최근에는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여러 가지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법안내용이 졸속으로 강화된 결과 당초 취지와는 달리 새로운 기술개발을 저해하거나 중소기업의 부담을 과도하게 증가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내 화학산업의 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문제점들이 충분히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어느 한쪽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다보면 균형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공무원이든 국회의원이든 국가로부터 봉록을 타는 공직자는 국익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처리해야 한다. 더군다나 시장을 놓고 국가 간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무엇이 국익을 위한 것이고, 무엇이 시장을 보호하고 육성하며 창출하는 것인지 바르게 인식하여 현명하고도 신속하게 대처해야 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