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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에세이-냅킨 시인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24-06-09 (일) 22:17 조회 :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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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에세이





냅킨 시인


                                                                            이 순 형(수필가/수도E&C대표)


며칠 전, 후배가 초대한 모임에서였다. 여럿이 앉아 고기를 굽는 자리에 언젠가 본 듯한 초로(初老)의 여인이 시치근히 인사하며 곁의 자리를 권했다. 노릿하게 익은 삼겹살을 먹으며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5년은 넘었겠다는 그녀 말에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의 머릿속은 처음 만난 여자가 90%를 차지하고, 어제 만났던 여자가 9%, 그리고 1%를 아내가 차지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 어스름 불빛 아래 머리를 굴려 기억을 뒤졌지만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긴 처음 만난 인연도 시간이 가면 얼굴 모습은 지워지고 분가루 냄새만 코끝에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자리에서 만났던 사람은 역시 취해야 다시 기억이 나는 법인지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비로소 어느 단체 회식 자리가 떠올랐다. 식사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가라오케로 자리를 옮겨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술버릇이 재발하여 시 한 줄 쓰려는데 깜짝 놀랄 이야기를 그녀가 쏟아놓았다.

“참, 이 선생님. 나 그 시인가 하는 것 땜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처음 만났던 5년 전 그날, 술자리에서 받은 ‘냅킨 시’를 취한 정신에 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남편에게 들켰단다. 이놈이 누구냐, 당장 찾아가자고 다그치며 펄펄 뛰는 남편에게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이 없더란다. 가까스로 달래서 재웠더니 이튿날 깨자마자 코앞에 냅킨을 들이대며 닦달하더라고,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며 눈을 흘긴다고 했다. 아니 우리가 무슨 연애질이라도 했냐고, 기가 막혀서 미칠뻔했다고 늘어놓는데 나도 황당해서 마신 술이 확 깨버릴 지경이었다. 서로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5년이나 지나 우연히 다시 만난 지금까지 의심을 받는다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수필을 공부할 때 서정시를 많이 읽으라는 권유를 받은 일이 있다. 거기에 보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해보라고 해서 김소월 시집 등을 들고 다니며 중고생 시절로 돌아가니 역시 가슴에는 촉촉이 이슬비가 내렸다. 그 빗방울이 내 가슴에만 내렸으면 좋으련만 술잔에도 흘러넘쳐 결국 사단이 난 모양이었다. 유치환은 함께 근무하던 학교의 여선생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며 서정시인의 최고봉에 올랐는데, 흉내라도 내보려던 나의 연시(戀詩)는 공연히 낮선 여자들을 향한 치정(癡情)의 잡문(雜文)이 되어 정신만 혼란스럽게 했나 보다. 그날 밤에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식칼을 들고 문을 두드리는 꿈을 꾸는 등 잠자리가 불편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가정불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 내 잘못, 아니 나의 요상 망칙한 술버릇 탓이라 변명할 명분이 서지 않았지만 자칫 평화로운 가정이 깨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모골이 송연했다. 더는 술맛도 없어 반도 더 남은 술병을 팽개치고 나와버렸다.

신께서 술을 빚을 때 사람, 원숭이, 개의 영혼을 넣어 빚으셨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사람의 영혼이 나와서 좌장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신사처럼 잔을 부딪치며 덕담으로 시작하지만, 조금 취하면 원숭이의 영혼이 나타나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지껄이는 원숭이, 취했다고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술잔을 돌리는 유인원, 남의 흉보기가 취미인 듯 자꾸만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 가며 불평을 늘어놓는 잔나비까지 여러 가지이다. 그러다가 더 취하면 눈을 찌푸리게 하는 짓도 종종 나타나는데, 그 주사(酒邪)도 갖가지로 가관이다. 인사불성이 되어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면 그나마 귀여운 모습이고, 공연히 남에게 시비를 거는 맹견(猛犬), 술상을 걷어차는 도사견, 이유 없이 울어서 좌중을 당혹하게 하는 상갓집 누렁이까지 행태가 다양하다. 오죽하면 일찍이 서양의 선교사들이 포교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금주령(?)을 내렸겠는가.

술 좋아하는 필자라고 다를 게 없다. 여러 가지겠지만 특히 술 파는 카페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면 시(詩)를 써주는 버릇이 있다. 시라고 해 봤자 유행가 가사 수준에도 못 미치는 유치한 것이지만 취한 줄도 모르고 우쭐대며 운율을 맞추느라 심각한 표정이 된다. 제법 서정적인 구절을 엮어 탁자 위 냅킨에 사춘기 소년처럼 분홍색 글을 끄적인다. 그 짓도 되풀이하다 보니 최고의 작품이랍시고 써내도 결국 다른 여인에게 써준 잡문과 도긴개긴이다. 그래도 속아 주기를 기대하며 예쁘게 퇴고까지 거쳐 종이에 옮겨 적는다. 카페 여주인이나 종업원들은 시인이냐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속내는 속아 주는 척하는 장삿속이란 걸 뻔히 알지만 기분만큼은 최고다. 가끔은 손님으로 온 다른 팀과 합석하거나 단체로 회식하는 날이면 내 딴에는 실력을 발휘하여 “오늘 밤에는 비너스와 잔을 기울인다.”라고 기름 바른 시를 쓴 냅킨을 접어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그러나 이튿날 술이 깨면 누구에게 무슨 시를 써 주었는지 아득하고, 술이 덜 깬 머리로는 생각하기조차 귀찮아진다.

문득 창밖을 보니 벚꽃잎이 바람에 눈처럼 흩날린다. 카페의 탁자에 앉아 그날 밤의 악몽을 떠올리며 혼자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아무 여인에게나 시를 써주는 취미야 나만 좋지 받는 여인들에게는 별스러운 할아버지로밖에 더 보이겠는가? 이 버릇을 고쳐야겠는데, 최선책은 술을 끊는 방법이다. 오늘이 술잔과 이별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역시 대작할 친구가 있어야 하겠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밖에는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고 시계는 술 마시기 좋은 유시(酉時)를 가리킨다. 아니, 주시(酒時)인가.


*수필가 이순형은 국제상사와 수산중공업 해외영업부 근무를 했으며 무역회사인 ㈜파워킹과 세척전문기업인 수도E&C 대표이다. 1952년 수원시 태생으로 서울대 농생명과학대학과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계간수필로 등단했다.

저서로<서방견문록><월급봉투> 동인지로 <달속의 달><만수래 만수거>등이 있으며 한국문인협회회원이며 계수회,수수회,토방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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