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에세이-한운사의 –구름의 역사-중에서
*한운사(1923-2009년)/충북괴산출생,청주상고,서울대 불문과,한국일보 문화부장, 장편-이생명 다하도록/현해탄은 알고 있다/승자와패자/시나리오-빨간 마후라/한국방송작가협회고문
나라의 격이 달라졌다
오래간만에 멋있는 소리 한번 들어봤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구에 가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 사업을 논하는 장소에서 희한한 소리를 했다.
한쪽 다리까지 불편해진 그는 요즘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소리인가.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바꿔놓은 휼륭한 업적을 가진 분이라고. 우리 모두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고 평가하면서 그를 기념하는 사업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해가 서쪽에 뜬 기분이다. 믿어도 되는가, 말 잘하는 대통령이 영남의 인심을 얻으려고 비상한 수법을 썼다고 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충격적이다. 진심에서 나오는게 아니면 그렇게 엮어져 나갈 수 없다.
“나는 맹세코 정치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반대했지만 인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나는 박 전 대통령을 비난했지만 정치,경제 정책만 비판했다. 박 전 대통령이 6.25 이후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 서구 사회처럼 된다, 큰 공장 짓고 세계 속에 우리 물건을 팔 수도 있고 고속도로도 만들 수 있다.’며 자신감을 준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런 공로는 참으로 지대했다. 근대화를 이룩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김 대통령은 또 “미국은 200년 역사를 가졌지만 국민 마음속에 대들보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훨씬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겨우 세종대왕과 이순신정도다. 박 전 대통령까지 이상하게 취급받아서야 되겠느냐.” 고 하면서 “이제는 역사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국민들에게 전달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들의 가슴 아픈 추억을 언급하면서 힘주어 말했다.
“박 대통령은 국민 속에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근대화도 있지만 국민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확신감을 갖게 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잘한 점을 높이 평가해서 돌아가신 분이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아야 될 것이다.”
김 대통령은 이것을 국민 화합의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이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한국 정치의 대비약이다.
어떤 정치인도 감히 손대지 못한 영역의 암울을 일거에 환하게 비춰준 기사이다. 박 전 대통령이 불의의 시해를 당한 뒤 그의 치하 18년을 조리있게 또 정당하게 만인이 납득할 수 있도록 청산할 기회는 꽤 있었지만 모두가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다. 가령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접목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좋은 입장에 있었다. 만약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어제까지 우리는 정신없이 뛰어 왔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다. 지금 박 전 대통령이 심어놓은 여러 가지 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렸다. 맛있고 우리 몸에 이로운 것은 정성을 다해 가꾸자. 그러나 독소가 있는 나무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은 무자비하게 뿌리째 잘라 버리자.” 그렇게 원칙을 정리하고 나라를 이끌어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때의 그 질서정연한 나라 모양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우리가 겪은 그 많은 힘든 고비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모양이 딴판으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군사정권이니 독재니 얼마나 매도해 왔는가. 그러나 박정희라는 사람이 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김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커다란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을 보는 기분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나라의 격이 올라간 것만 같다. ( 1999.5.15./환경경영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