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학자의 병상수상록
정회성박사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사회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이 졸지 암에 걸려 마지막 7개월간의 투병생활중에 진솔하게 토해낸 책을 읽기는 정회성박사의 병상수상록이 처음이다.
18편의 병상에세이는 한 생명이 죽음의 문턱에서 한 점 가식 없이 구술하였기에 진정한 생명의 끝을 관조하게 된다.
글 중에서 정회성박사의 인생 최후진술이며 솔직한 고백을 발췌하여 독자에게 증정한다
-길샘 김동환
암과 싸우는 그 절박한 시간들 속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인류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간절한 염원,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지구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환경학자로서 책임감을 느끼시는 모습에서 이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어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회성 박사님을 추모하며-(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합장)
이 글은 죽음이 나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2015년 10월 자재병원 입원 이후부터 2016년 5월말까지 병상에 누워 지낸 7개월 동안 내 뇌리를 스쳐갔던 생각과 감상,그리고 깨우침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글을 정리할 때에는 내가 사지마비가 심각하게 진행된 후여서 구술한 내용을 집사람이 녹음해서 글로 옮기면 그걸 듣고 내가 다시 수정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이제는 누워서 천정을 쳐다보는 모습으로 하루 24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니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건강을 회복해서 서울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6-7개월 남짓 되는 짧은 기간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내리는 몸의 컨디션과 함께 절망에서 희망으로 그리고 다시 절망으로 끊임없이 마음의 변화를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그렇다. 무상이다. -무상-
우선 나는 물을 많이 먹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75%가 물이다. 물은 우리 몸을 순환하면서 노폐물을 배출하고 산소와 영양분을 몸 곳곳에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신체 구성성분이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물을 가급적 안 먹으려 노력했다. 물을 안 먹게 된 것은 대학원 다닐 때 사상의학의 최고 권위자라고 자칭하는 동네 약사에게서 내가 태음체질이라 습하고 차기 때문에 물을 먹는 것이 좋지 않다고 들은 이후부터이다.
이 약사의 말을 믿고 그대로 실천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최근에 나의 마지막 책-지속 가능한 행복의 길-의 준비 과정에서 건강,두뇌등 인체에 대해 공부하면서 비로서 깨달았다. 좋은 물을 충분히 마시는 것은 체질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건강관리의 기본인데 나는 그것을 역행한 것이다.(중략)
지나치게 과로를 한 것도 사실이나 일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하면서도 건강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건강관리의 기본요소, 즉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근력, 몸의 순환을 제대로 하게 해주는 수분섭취,그리고 충분한 단백질과 고른 영양소를 공급하는 규칙적인 식사, 이러한 것들을 내가 소홀히 한 것 같다. -왜 아팠을까-
스님과의 대화 이후 누님이 더 생각나고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은 더 깊어졌다. 내 어렸을 때부터의 신조 중 하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나는 좀체 울지 않는데 나의 무심함에 대한 자책과 후회로 눈물이 났다. 한편 이날의 대화가 계기가 되어 2월에 이곳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누님생각-
어머니가 그립다. 내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지난 1년 넘게 어머니를 뵙지 못했다. 96세의 어머니는 지금 치매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데 병원으로 형님이 방문하면 아버지 식사 차려드리지 못한 것을 걱정하시면서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어머니-
어느 날 능행스님께서 내 방을 방문하셔서 말씀 중에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으셨다. 질문을 받고 나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육십 평생을 잠깐 돌아보게 되었다.(중략)
생각하고 보니 생명을 이루는 DNA의 최대 의무는 자기복제품을 남기고 가는 거라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생명체로서 2세가 탄생하면서 느낀 행복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
살아오면서 마음 밑바닥에서 늘 나를 긴장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는 가정과 직장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 대한 빚진 마음이었던 것 같다.(중략)
생태계의 원리에 충실히 따르면서 개발하면 그것이 보전이 될 수 있고 그 원리를 어기면서 자연에 개입하면 파괴가 되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은 그런 점에서 큰 오류를 범한 사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빚진 마음-
큰 애의 결혼 문제는 그런 식으로 마무리가 되고 살 집이나 그런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이미 이야기 되고 합의되어 있기 때문에 잘 될 걸로 생각된다.
결혼 날짜를 잡고 나니 내가 회복이 되어서 식장에서 하객들을 맞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부질없는 욕심이 문득 든다. 바로 지워버린 생각이긴 하지만 내가 없더라도 둘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큰 아들의 결혼에 대해-
몸이 한창 좋아지던 1월 어느 날 능행스님이 이곳 정토마을의 스님들과 병원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나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중략)
내가 환경학자로서 이해하는 불교와 현대과학과의 관계를 40여명의 정토마을 식구들에게 한 시간 여에 걸쳐 이야기 하였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강의이겠지만 정말로 우연한 계기로 불교에 대한 평소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또 깊이 사유해볼 수 있어 내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다. 또 강의에 참석했던 분들이 호의적인 피드백을 많이 주어 기쁘고 보람 있었다. -마지막 강의-
벌써 반년 이상 내 침대 아래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아내를 생각할 때 살인을 하는 것 같고 죄인이 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목숨을 연명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양은 최소한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먹다가는 문득 –이게 무슨 짓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밥 이야기-
병원에 있으면서 걷지 못하고 침상에 오래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은 특히 발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장기간 입원해 누워있는 사람을 문병 갈 때는 꼭 환자들의 발을 맛사지해주길 권하고 싶다. -발이 차다-
생각나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연례행사로 일어나고 있는 소, 돼지, 닭, 오리등의 생매장이다.
그 생명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 물론 생명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테지만 내 자신은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했을 뿐 그 생명들을 위로하지 못했던 것 같다. -티벳 스님-
나는 환경을 공부한 덕분에 생명이니, 생태계니 지구환경이니 하는 단어를 많이 썼는데 이번에 병상에서처럼 생명에 대해 그야말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생명에 대한 단상-
내가 음식을 굶는 것이 옆에서 보는 것과 달리 그렇게 고통스럽거나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웰다잉에 대해-
스님들은 아미타불 염송이 무의식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심으로 해야 된다고 하는데 내가 무의식중에도 아미타불 염송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염불선-
누구에게 크게 빚을 졌다는 생각도 없고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아쉬움이나 미련이 남는 일이 특별히 생각나지 않는다.(중략)
만약 내가 환생한다면 나는 금융자본주의에 찌든 현대문명을 개조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싶다. 국가정책을 연구한 사람으로 정책에 대한 연구를 좀 더 깊이 하여 그러한 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평생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한국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서 교육받고 자라고 싶은 생각을 별로 없다. 지금 한국의 교육시스템이나 사회 분위기에서 내가 가는 그런 길을 구상하고 실천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렇게 불구의 상태로 너무 오래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두려웠고 삶 자체를 내 힘이 아닌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요즘같은 자원 결핍시대에 환경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아무 생산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얼마 안 있으면 내가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 꿈 이야기-
묘지를 쓰지 말고 화장을 해서 동해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묘지를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환경파괴이다. 특히 한강 상류에 있는 묘지들은 정말로 흉물이고 거기서 수해가 나면 묘지에 있는 사체들이 서울시민의 식수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하는 문제이다.(중략)
화장을 해서 유골을 동해바다에 뿌리라고 한 것은 내가 평생 환경을 공부했지만 여건상 나라 밖의 환경파괴현장들을 찾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내 영혼이 있다면 고래등을 타고 태평양의 쓰레기섬등 지구촌 곳곳의 자연파괴현장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이다. -유언-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주변과 동화되면 될수록 경계가 낮아져서 변화가 쉬워지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지고 변화를 쉽게 받아 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가 죽음에 대해 느끼는 경계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덜 두렵고 더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경계 넘어가기-
지난 22년간 수 천명의 죽음을 배웅한 죽음전문가 능행스님은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만큼 중요하며 죽음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죽음의 끝이 아니며 또 다른 생의 출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능행스님에 대해-
정회성박사가 살아온 길
-1954년 전남보성군태생/영남대 경영학과 학사/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대학 정책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