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458건, 최근 0 건
 

남선광 논문 “조선시대 下水道 역사를 통해 본 爲民情神과 民本思想의 변화”-2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21-08-17 (화) 15:01 조회 : 627
글주소 : http://ionestop.kr/bbs/board.php?bo_table=B04&wr_id=482

치수사업도 국민의 입장에서 사업해야

영조시대 민주적 절차의 준천(濬川)사업

하수도에서 통치철학을 조명한 논문

태종 119월부터 신료들과 논의하여 개천 준설공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가고, 다음 해인 태종 12년 정월 15일부터 대규모 개천 공사가 시작되어 한 달 만인 215일에 준공을 보았다. 이때 전라·경상·충청도에서 5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공사를 관장할 기관인 개천도감(開川都監)이 설치되었다.

세종 3(1421) 여름, 큰비가 연이어 퍼부으면서 개천이 넘쳤고 수많은 익사자가 생겨났다. 특히 하류가 막혀 물이 잘 빠져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75채에 이르는 집들이 떠내려갔고 거리에 곡하는 소리가 가득할 정도의 참변이 일어났다. 태종의 개천대역(開川大役)이 있은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에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판한성부사 정진의 상소를 받아들여 공조(工曹)에 명령을 내려 개천 공사를 시행하라고 명하였지만 태종 때와는 달리 일시에 큰 공역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재위 4년 정월부터 162월까지 10여 년간 농한기만을 이용해 소규모의 보수·확장을 거듭하면서 개천의 배수 기능을 완비했다. 세종은 특히 지류(支流)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도성 밖 하천도 필요에 따라서는 개착하고 정비했다. 동대문 근처의 수문은 늘리고 개천 좌우 제방에 둑을 쌓고, 종묘 동구(洞口)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 돌로 쌓았다. 보조 물길로써 종로 좌우 행랑 뒤에 새로운 도랑을 판 것도 주목된다.

세종 때는 개천 준천과 관련해 팽팽한 논쟁이 있었다.

개천의 기능을 풍수학상의 명당수(明堂水)로 볼 것인가, 도시의 생활 하천으로 볼 것인가의 논쟁이었다. 다시 말해 명당수로 깨끗이 유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수도 구실을 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결론은 도시의 생활 하천인 하수도로 결정되었다.

태종·세종 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재위 49어제준천명병소서(御製濬川名幷小序)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기를 근 50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고 하면, 나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세 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세 가지 일은 탕평(蕩平), 균역(均役), 준천(濬川)이다. 영조는 이 글에서 균역, 준천은 성공했으나 탕평은 실패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영조 스스로 준천을 자신의 가장 큰 치적 중의 하나로 내세운 것으로 보아 개천 정비에 얼마나 애정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헤아려진다.

영조가 준천 사업에 임하여 백성들에게 기울인 애정과 위민정신은 준천사실(濬川事實)어제서문(御製序文)에 잘 나타나 있다.

- 아아! 나는 덕이 부족하고 능력이 없어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36년이나 되었으나 선왕의 왕업을 제대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마치 깊은 못이나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처럼 근심하고 걱정하였다. 큰일과 중요한 일은 비록 거론할 수 없으나 그 가운데서 보수하고 보충해야 할 곳은 감히 게을리 할 수 없다. 준천사(濬川事) 같은 일은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백성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없다. 나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였으니 무슨 마음으로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고요히 생각해보니 그 시기를 그냥 넘겨서도 안 되고 일을 지연해서도 안 될 것 같아 강제로 시행하니 영차영차 소리를 들어도 이 마음이 편치 않고 준천하는 곳에 나가보아도 이 마음이 쉅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개천을 준설하는 것이 비록 주나라 문왕의 영대나 하나라 우왕의 치수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고 또한 은나라에서 대()를 만들고 수나라에서 치수(治水)한 것에 비교할 것도 아니다. 다만 한편으로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백성을 위하고자 함이었을 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영조의 爲民을 위한 勞民정신과 民本思想을 가슴에 품고, 무늬만이 아닌 제대로 된 민주적 숙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위민을 펼치고자 하는 자가 누구인지?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두 눈과 두 귀를 활짝 열어놓고 찾아볼 일이다.

조선시대 한유에 비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면서 성종 대까지 국가의 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오랜 기간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책의 서문을 작성한 서문 전문가였다. 그의 명문들은 [사가집(四佳集)]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은 한강물이 넘실대는 지금의 양화대교 주변의 절두산성지 지역을 둘러보며 한편의 시를 남겼다. 이 지역은 사대부들의 별장이 많았으며 넓은 도선장에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리들과 상인들의 선박들을 보며 뱃놀이의 풍광을 시로 읊었다.

(정리/환경경영신문 서정원 기자, 논문 남선광)


 양화도 어귀에서 뱃놀이 하니

별천지가 바로 예로구나

어찌 신선과 학을 타고 놀아야만 하는가

해가 서산마루에 지면서

황금의 물결 이루노니

흥이 절로 인다.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로 120길 18, 다동101호 / 02) 351-3143 / FAX 02)356-3144 / ionestop.kr / agamool @hanmail.net
발행인 김동환 / 편집인 김동환 / 등록번호 서울, 아02186 / 등록일 2012년 07월 06일 / 발행일 2012년 07월 13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서정원 Copyright ⓒ 환경경영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