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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광 논문 “조선시대 下水道 역사를 통해 본 爲民情神과 民本思想의 변화”-1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21-08-17 (화) 14:55 조회 :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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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수사업도 국민의 입장에서 사업해야

영조시대 민주적 절차의 준천(濬川)사업

하수도에서 통치철학을 조명한 논문


환경부에서 하수도 분야 전문가로 공직을 마감하고 상하수도협회 하수도전략사업단장을 지낸 남선광 씨가 최근 발표한 조선시대 하수도 개선사업을 조명한 조선시대 下水道 역사를 통해 본 爲民情神民本思想의 변화라는 논문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남선광 씨는 논문에서 조선 초기와 후기의 대대적인 하천정비 사업은 백성들에 의한(勞民) 백성들을 위한(爲民) 民本에 근거한 사업임에는 같으나 시행동기, 정책결정과정, 준천내용, 지속적인 추진을 위한 규범 마련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8년에 걸쳐 대신을 비롯한 신하들과 유생 그리고 일반백성들에까지 의견을 수렴하여 을 정책결정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자발적인 참여를 요청한 점은 현대의 민주주의와 흡사하며, 조선의 르네상스시대에 걸맞게 實事求是의 사상으로 개천의 관리와 보수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유를 보여주고 후대의 규범으로 제도화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장기간 민의를 수렴하고 치밀한 사전 준비에 따른 사업 시행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오늘날의 정치세력이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살리기사업은 그 규모의 방대함에 비하여 사업 추진계획발표에서 착공까지 불과 7개월, 완공까지 4년여 만에 완료함으로써 홍수예방과 생태복원·수질개선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가치평가가 절하되었다.

(*편집자 주- 청계천 복원사업의 경우 외형적인 면은 기후변화와 도시경관 및 시민문화를 아우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개천의 지반을 원천적으로 모래, 자갈, 황토 등을 다져 자연복원을 해야 했으나 시간적, 공법적 문제를 삼아 플라스틱 재질인 시트로 바닥을 지하토양과 완전 차단하여 토양의 자연 순환 고리를 끊게 한 것은 향후 다시금 제대로 된 시공에 따라 복원사업을 해야 하는 숙제를 남겨주고 있다. - 논문을 요약하여 정리한다.)


2007년 영국의 저명한 의학잡지인 British Medical Journal은 주요 선진국 의사들을 대상으로 지난 150년간 의학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진전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에서 항생제나 백신이 아닌 물 위생의 안전1위를 차지했다. 상수도(소독한 물)와 하수도(도시위생 확보)가 인류의 평균수명을 늘리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都城 한양은 풍수지리 등을 고려하여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졌으나, 四面이 산악과 능선으로 둘러싸인 산간 분지 형태의 지형적 여건으로 배수가 잘 되지 않아 하천에 퇴적된 土砂와 급증하는 인구로 인한 오물로 강우 시 하천 범람과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 초기 태종·세종 시대에 하천 바닥을 깊게 파고 제방을 쌓는 1, 2차 개천(開川)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약 300여 년간 하천관리가 소홀해지면서 도성 내의 배수 문제로 비가 조금만 와도 하천이 범람하고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으나 임진·병자 兩亂과 막대한 준설 비용 문제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에 영조는 1760년 연 인원 20만 명과 엄청난 재정이 들어간 조선 최대 규모의 준천(濬川)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 특히, 영조가 준천 사업이 백성들의 피해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爲民)인지 오히려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勞民)인지에 대해 8년에 걸쳐 신하들과 토론하고 유생들과 일반백성들에게도 몸소 의견을 물어보고 집행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조선초기와 후기의 하수도사업을 통하여 爲民情神民本思想의 변화를 비교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한양의 지형이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타산의 사산(四山)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되어 있어 사산(四山)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하천에 쌓이게 되어 원활한 배수에 지장이 있다. 이는 영조의 준천사절목(濬川事節目) 첫머리에도 나온다. ‘크고 작은 개천에 토사가 쌓이고 막히는 이유는 오로지 산이 씻게 내려가며 둑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관리하지 않고,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지 않아 다리가 모래에 파묻혀도 그것을 준설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國譯 濬川事實 舟橋指南, 2001, 44)

게다가 백성들이 땔감으로 산에서 함부로 나무를 벌목하여 민둥산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하천에 쌓이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발생된 오물을 하천에 무단으로 투기함에 그 정도가 날로 심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을 개천(開川)’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고문헌, 고지도에도 개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개천이라는 말이 청계천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지는 않았다. 태종 때 내를 파내는 일’, 개천’, ‘개거가 완료된 이후 만들어진 하천에 개천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 이후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 말을 사용했다. 내를 파내다라는 보통명사 개천이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개천을 청계천이라고 고쳐 부른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개천은 자하문 앞 백운동에서 발원한 청풍계천에서 흐른 물줄기가 광교와 동대문 옆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지나며,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가는, 길이 약 8킬로미터, 최대너비 66.7미터의 옛 서울 안 최대의 하천이었다. 개천은 도성 내부를 거의 정확히 양분했기 때문에 한양의 설계에 기본적인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궐과 종묘사직, 주요 관청이 모두 개천 이북에 들어서고, 이남으로는 중하층 민가 지대가 들어서면서 개천을 기준으로 하여 상하 이원적인 공간 질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청계천 이남지역이 오히려 부유층의 터전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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