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기획에 대하여
2.2. 문제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라
▲ 실체實體, substance는 전통적인 유럽 철학의 기본개념으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상황·작용·관계 등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 존재를 의미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실체는 하나이거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리 보일 수 있는 현상을 경고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담당한 업무 중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도나 정책을 추진하다보면 여러 가지 민원이 발생하거나 이해관계자들의 반대 내지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공직자들은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때로는 사건 사고 등을 통해, 때로는 감사원 감사나 국정감사 과정에서 문제를 지적받기도 하고,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문제를 인지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건 공직자들은 상시로 담당하고 있는 업무 중 문제가 있는 부분을 인식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포인트는 앞에서 말한 경로를 통해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피상적인 수준에 그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필자가 현직에 근무할 당시의 어떤 경험들은 반추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담당자의 보고를 받는 중에 문제의 본질을 보다 깊이 알아보기 위한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는데, 많은 경우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기억이 필자에게 있다. 짐작컨대 그 원인은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경로가 어느 일방의 주장만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내용을 그대로 전달받는 방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기에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경로에만 의존하는 안이한 정보 수집으로는 역부족인 것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직접 부딪혀 만나보고, 현장을 확인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정보 수집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주장이 충돌할 때에는 객관적,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여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단순히 문제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문제의 발생원인과 과정, 문제와 관련된 이해관계자 및 그들의 입장,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제도 및 정책, 행태 등 다양한 요소들까지도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를 세밀히 살피는 과정은 문제해결의 해법을 찾는 과정을 포함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자기 부서의 동료나 직원들로부터만 배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동호회와 같은 비공식informal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인간관계의 폭도 넓히고 조직문화에 동화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권장할 만한 일이다.
2.3. 문제해결을 위한 가능한 모든 대안을 도출하라
현안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사례가 종종 있다. 이러한 사례에 착안하여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을 ‘cross functional system’이라고 한다. ‘brain storming’ 또한 엉뚱한 아이디어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대안 마련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크든 작든 좋은 정책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한다. 문제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해답을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도출되면 그것을 단순히 나열할 것이 아니라 유사한 분야를 하나로 묶고, 중복되는 것은 버리고, 문제의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한다. 보고는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라는 것은 단순히 그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정책결정을 염두에 둔 문제의 정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실행방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정책결정자가 향후 문제해결을 위해 집중해야 하는 질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관리가 가능한 단위로 나누어 생각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또한 문제해결에 조직 내지는 팀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팀원들 간에 공통된 작업의 틀(framework)을 공유하며 활발한 소통(communication)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구조화하는 방식을 훈련해야 한다.
문제가 정리되면 각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들을 찾아야 한다. 전문가의 조언을 구할 수도 있고, 선임자들의 경험을 들어보는 것도 좋다.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들어보는 일은 실체에 더욱 접근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으므로 노력만 한다면 해외사례 등의 필요한 정보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해보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몰입하여 고민하다 보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훌륭한 대안도 찾아낼 수 있다. 대안은 때로는 엉뚱한 곳,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찾아질 수도 있다. 그 분야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사람에게서도, 사무실이나 회의실 공간이 아닌 밥 먹는 자리에서 가볍게 고민을 이야기하다가도 대안이 튀어나올 수 있다. 그렇게 찾은 대안이 효자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요즘 학제간 협력, 융합적 사고, cross functional 등의 용어들이 크게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는 이미 시행 중인 정책들도 제시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거나 과도한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안들도 포함될 수 있으나 그러한 대안들은 핵심적인 대안으로 성립될 수 없다. 대안 리스트에서 과감하게 제거하는 결단도 필요하다. 불합리한 대안들은 세밀하고 과학적인 대안분석의 전 단계에서 제거해 두는 것이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문제해결의 핵심에 다가서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대안들 중에서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영향(impact)의 정도를 고려하여 우선순위(priority)에 따라 정리하는 것도 정책결정자의 합리적인 판단을 도와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우선순위를 정할 때 영향의 정도보다 실행가능성(feasibility)이나 실행의 난이도를 고려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대안을 모색하는 방법론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을 위해 고도로 몰입하는 자세이다. 즉, 해답을 찾기 위하여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몰입과 고민은 종종 생각지 못했던 답을 선물로 준다.
필자의 경험을 하나의 사례로 들어보자. 수도권 2000만 주민의 젖줄인 팔당 상수원의 수질은 1990년까지만 해도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 수질관리를 위한 지표의 하나) 기준 1.0ppm 수준으로 매우 양호했다. 그러나 준농림지역(準農林地域) 제도와 같은 정부의 토지이용 규제완화 정책으로 인해 상수원보호 차원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지역이면서도 경관이 뛰어난 팔당호 상류의 하천 인접지역에 음식점, 숙박시설 등의 시설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섰고 그 결과는 급격한 수질의 악화로 나타났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초에는 급기야 1.5ppm까지 상승하여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거의 모든 언론에서 2~3개월 동안 팔당호 수질문제를 톱뉴스로 다룬 초미의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통령이 환경부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직(職)을 걸고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환경부는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대책기획단(Task Force Team)을 구성했다. 대기정책과장으로 일하고 있던 필자는 긴급히 수질정책과장으로 전보되어 바로 이 팀에 합류하였고, 십여 명의 팀원들과 6개월 넘게 합숙하다시피 하면서 대책 마련에 몰두했다. 당시의 팀원들 모두는 근본적이고, 과학적이면서, 합리적인 종합대책을 찾아내자는 의지로 심지어는 여직원들까지 사무실에 침낭을 가져다 놓고 밤을 새워 일을 했다. 그 결과로 팀은 수질오염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차원의 입지규제 정책인 수변구역제도의 도입, 규제지역의 피해를 보전해주기 위한 물이용부담금 제도의 도입과 수계기금 마련, 수질예측모델링 기법에 기초한 환경기초시설 투자계획과 수질오염총량관리제도의 도입, 비점오염원에 대한 관리제도 도입과 같은 종합적인 대책(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책(안)이 발표되자 규제대상지역의 반발은 팀의 예상 이상으로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대책(안)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무단 점거로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청회는 오프닝도 못하고 무산되었고, 여의도에서는 2만여 명의 주민들이 반대시위를 했다. 반대단체 대표들과 만나 대화도 해보고, TV 공개토론도 하고, 신문에 광고도 내보는 등 다양한 접촉과 대화를 추진했지만 좀처럼 타협의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았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팀은 시도 때도 없이 토론을 계속했지만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고민과 집중의 결과였을까, 어느 날 밤의 꿈속에서 필자는 반대단체들을 설득하고 있었고, 필자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듯 반대단체 사람들이 수긍하며 머리를 끄덕이고 있는 분위기였다. 꿈속에서 필자가 쏟아낸 말들이 마치 생시처럼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중에 ‘이건 꿈이구나.’ 하는 각성이 왔고, 필자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메모를 시작했다. 꿈속의 기억은 흔히 순식간에 까맣게 사라지곤 하지 않는가.
며칠 후 반대단체 대표들과의 만남은 대성공으로 끝났고 대책(안)은 대책으로 확정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조금 황당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필자는 현몽(現夢)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안의 모색이라는 주제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사례는 아니지만, 진정으로 고민하면 꿈속에서조차 답을 얻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경험담을 참고삼아 소개해보았다.
<글/ 문정호 전환경부차관 >
